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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성인

삼성산 성지는 1839년 기해 박해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성앵베르주교님과 모방, 샤스탕 신부님께서 1843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모셔질때까지 58년 동안 묻혀 계셨던 묫자리입니다.

성 엥베르주교

조선의 제 2대 교구장 성 앵베르(Laurent Marie Joseph Imbent,(한국성 범, 1796~1839) 주교는 1818년 10월 8일 파리외방 선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다음해 3월 27일 부제품을 받고 12월 18일 사제가 되어 중국 사천지방의 선교사로 임명 되었다.
1833년 브뤼기에르주교와 마카오 주제 파리외방선교회의 지부장인 로그레즈와 신부에게 조선선교회를 자원하였다.
1835년 1월 12일에는 모방신부와 샤스탕신수가 르그레즈와신부에게 브뤼기에르주교의 유고시 계승자로 앵베르 신부를 추천하였고 르그레즈와 신부는 이를 파리외방선교회의 신학교 교장 신부를 통해서 포교성성에 상신하여 승인받았다.
1836년 5월 앵베르 신부는 조선교구장의 보좌주교로 선출 되었고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1837년 4월에 제 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837년 12월 18일 조선교우들의 안내를 받아 국경을 넘었고 12월 30일 한양에 도착하여 정하상(바오로) 집에서 모방신부를 만나 그와 함께 지냈다. 주교가 도착한 후 1838년 11월 1994명이 세례를 받았고 교우 숫자는 약 9천여명에 이르렀다. 앵베르 주교는 한양에 도착하자 즉시 사제직에 적합한 사람을 물색하였다.
그리하여 42세의 정하상, 32세의 신자 그리고 두명의 청년에게 매일 점심식사후 두시간씩 한문 신학서를 가지고 3년동안 신학을 강의하여 서품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기해 대 박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조선교구 창설 54년 조선교구 설정 7년만에 조선 땅에 온 최초의 주교였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교구장구교와 신부들이 있으며 신가가 있는 참 모습을 갖춘 훌륭한 교회의 기반이 되었다.

성 모방 신부

조선 대교구 설정이후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로 조선 입국에 성공한 모방(한국성 나, 1803~1839) 신부는 1803년 9월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태아나 비르(vire) 고등학교와 바이외(bayeux)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교구에서 보좌신부로 2년동안 사목활동을 하던 그는 교구장으로부터 자신의 꿈이었던 선교사 사명의 수행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1831년 11월 18일 파리외방선교회의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연수를 받았다.
선교사 부족으로 인한 연수기간이 단축된 모방신부는 1833년 3월 9일 복건지방에서 미지의 땅에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떠나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앙심과 용기에 감명을 받아 조선 선교의 동참자가 되겠다고 청원하였다.
조선 입국을 위해 중국을 거쳐 내몽고 서만자에서 브뤼기에르주교와 조선교우와 입국 날짜를 기다리다 뜻밖에 1835년 10월 19일 뇌일혈로 브뤼기에르주교가 숨을거두고 말았다.
슬픔속에 브뤼기에르주교의 장례를 치른 뒤 1836년 1월 변방에서 정하상,조신철 성인을 만나 상복 차림으로 얼굴을 가리고 무사히 국경관문을 넘어 먼저 입국한 유방제 신부와 한양에서 합류하게 되었다.
모방 신부는 처음 한양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점차 경기도와 충청도 17개소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여 270여명(유아영세 140명, 어른보례 110명, 어린이 보례22명)에게 성세성사를 주었고 630여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는 항구적 선교 활동으로 조선의 복음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한국 성직자 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최방제(프란치스코, ?~1838),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등 세명을 선발하여 유신부가 귀국할때에 중국을 통하여 마카오 신학교에 보냈다.
이때 모방신부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샤스탕 신부를 영입할 신자들도 동행 시켰다.

성 샤스탕 신부

샤스탕(jacgues honore chastan, 한국성 정, 1803~1839)은 1826년 12월 23일 사제 서품을 받고 다음해 1월 6일에 고향에 가서 자신의 계획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그것이 하느님의 원의라고 믿어 아들을 교회에 봉헌하고 가정의 행복을 희생하기로 하였다.
1827년 1월 13일 샤스탕은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에 들어갔다.
3개월동안 수련기간을 마친 샤스탕 신부는 4월 22일 네 명의 선교사와 함께 포르투갈 배로 1828년 7월 19일 마카오에 도착 하였다.
1836년 12월 25일 국경지방에 도착하여 3일후 조선교우들을 만났다.
1837년 1월 1일 샤스탕 신부 일행은 조선국경을 무사히 넘었다.
상복차림에 방갓을 쓰고 2주간을 걸어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1837년 부활 대축일을 모방신부와 함께 지낸 샤스탕 신부는 지방 교우촌을 순회하면서 성무를 이행하였다.
그는 모방신부와 함께 처음으로 교세조사를 실시하여 6천명의 신자를 확인 하였다.
두신부는 1837년 1년동안 1237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2078명 신자들의 죄 고백을 들었으며 1950명에게 성체를 배령하게 하였다.
 

세분 성인의 박해와 순교

1839년 기해년이 되어 조정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안동김씨세력과 조만영 일파의 정쟁의 갈등이 더해 외국인 신부들의 입국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어 갔다.
이때 유진길 성인과 조신철 성인, 정하상 성인등 교회의 중진들이 속속 잡혀 서소문형장에서 참수 되었다.
성 앵베르주교는 잠시 한양을 떠나 수원 상골 마을에 피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배교사 김순성에 의해 피신처가 알려지자 성 앵베르 주교는 교우들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 하여 자수를 하였다. 또한 앵베르 주교는 나머지 두 신부도 자수를 하는 것이 교우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성모방신부 성샤스탕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자수를 권유하였다.
이 권유에 따라 성모방신부와 성샤스탕 신부도 자수하여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세분 성인들은 두손을 뒤로 돌려 묶인채 가마에 태워져서 호송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
형장에서 성인들의 옷을 바지만 남기고 모두 벗긴 다음 두손을 앞으로 묶고 긴 막대기를 두팔 밑으로 넣었으며 두 개의 화살로 양쪽 귀를 위 아래로 뚫었다.
얼굴에 횟 가루를 뿌리고 나서 형장의 주변을 세 바퀴나 돌았다.
성인들에 무릎을 꿇게 하였고 다시 말뚝에 붙들어매단후 이어서 12명의 병졸들이 성인들을 둘러싸고 돌면서 한번씩 성인들의 목에 칼질을 하였다.
세분 성인은 우리나라 역사상 서양인에 대한 최초의 판결로 사형선고를 내려 1839년 9월 21일(음력 8월 14일) 군문효수라는 극형으로 한강의 새남터에서 목을 잘리게 되었다.
이때 엥베르주교의 나이는 43세, 모방신부와 샤스탕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때 범주교는 조선 입국 2년째 였고, 나신부는 3년9개월, 정신부 2년 9개월 째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