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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성지 약사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난 1839년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Imbert 라우센시오 范世亨) 주교를 비롯한 성 모방(Maubant 베드로 羅伯多祿) 신부와 성 샤스탕(Chastan 야고보 鄭牙各伯) 신부의 유해가 1843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안장되었던 곳이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3일 동안 모래와 함께 그대로 새남터 백사장에 가매장되었다. 신자들은 변복을 한 포교들이 사방에서 매복하고 있었으므로 발각될 것이 두려워 그곳에 잠입할 수가 없었다. 4일째 되던 날에는 용감한 신자 3명이 그곳에 잠입하였다가 그중 1명이 체포되었지만 더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아마도 시신이 부식하기 시작한 때문일 것이다. 이를 알고 있던 박순집 베드로의 부친 박바오로 등 7~8명의 신자들은 약 20일 후 죽음을 각오하고 백사장으로 들어가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는 데 성공하였다. 세분의 시신을 지금의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신부, 샤스탕 신부가 노구산에 안장된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미 순교자 현양 운동을 자발적으로 실천해 오던 조선 신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이 안장된 곳은 이내 신자들의 순례지로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 이에 교회 지도층 신자들은 신자들의 순례로 인해 순교자의 무덤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조선 사회의 분위기로 볼 때 또 어떤 일(예를 들면 부관참시와 같은)이 일어날지 몰랐으므로 이장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3~4년 후에 교우들이 (3위의 무덤을) 그대로 두면 일이 틀어질까 하여 노구산에 가서 파내어 본 즉 해골만 남은 것을……박바오로의 선산인 삼성산으로 이장하였다.

1843년 삼성산으로 이장 -당시 관 위에 숯가루로 기록한 비문에는 그 이장 연도가 1843년으로 쓰여져 있었다. 이 시기는 ‘김 프란치스코가 증언한 시기’(증언 5-②)와도 일치한다. 이때 이장 장소로 결정된 곳이 바로 관악산 서쪽 봉우리인 “삼성산(三聖山)의 북쪽 끝자락”이었다.

이 세성인은 1857년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882년 5월부터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을 위한 교회 재판이 시작되었다. 또한 1885년에 시복 판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는 1886~1887년에 삼성산으로 가서 순교자들의 묘역을 확인하였다. 여기에 김 프란치스코와 박순집 등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어 1891년 10월 29일 뮈텔 주교가 이곳을 순례한 이래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으로 옮겨질 때까지 매년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묘역을 손질하였다. 그러나 순교자 묘역 순례와 자발적인 현양 운동은 이미 박해 시대부터 이루어져 오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 가운데 하나였다.

1901년 10월 21일 세 순교 성인의 유해는 -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직자 묘지로 이장하였고 그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이장하였다.

1970년 봄, 대방동 본당 주임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안드레아)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루가) 신부의 회고를 토대로 삼성산 무덤 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 해 5월 12일에는 옛 무덤 자리에 ‘삼성산 순교 성지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노기남(바오로) 대주교, 그리고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가졌다.

1981년 9월 6일에는 신림동 본당 신자들이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 아래 삼성산에서 세 복자 묘비 제막식을 갖고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삼성산을 순례 성지로 성역화 하려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2년 9월 29일
신림동 본당 유영도 신부의 지도 아래 ‘삼성산 성역화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84년 5월 6일 -세 복자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1989년 서울대교구와 신림동 본당에서 세 성인의 묘소 자리 일대의 임야 약 16,000평을 공무원연금관리공단으로부터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 명의로 매입하였다.

1989년 9월 10일에는 세 성인의 무덤을 조성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가져와 이 무덤 안에 안치하고, 제대 등의 설치를 완료한 뒤 교황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와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배세영 신부, 오기선 신부, 유영도 신부의 공동 집전으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992년 9월 24일 삼성산 본당이 신림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정되면서 삼성산 성지의 관리는 삼성산 본당에서 맡게 되었다.

삼성산 본당은 1993년부터 본당내에 현양위원회를 두고 본당 차원의 현양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즉, 성지 순례객과 삼성산을 등반하는 교우들을 위하여 매주일 11시에 성지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매월 21일에는 세 성인의 치명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교자 현양 미사가 정례적으로 봉헌하고 있다.

1999년 4월에는 세 성인의 묘소 주변에 잔디를 심고 철쭉 및 벚나무 등을 심는 성지의 녹화 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001년 11월에 많은 순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아 오던 성모상이 예리한 도구에 의해 훼손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2002년 3월 21일 성모상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4월에는 성지내에 14처를 설치하여 순례객들의 신심 활동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삼성산 성지는 자연속에서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레지오 단체의 야외 행사나 서울시내 본당의 각종 단체 행사 등 순례객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삼성산 성지는 외국인 선교사인 세 순교 성인의 묘소를 가진 세계적인 성지이면서도 우리 교회의 신자들만을 위한 성지 시설로 인식되고 있을 뿐 지역사회의 모든 주민을 위한 일종의 문화유적지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이 성지는 신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등산로로서 인위적인 관리상의 통제는 불가능한 상태이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난 2001년 11월 1일 성지내의 성모상이 훼손되었을 때에도 그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였으며 2002년 3월 21일 다시 설치하면서도 무방비 상태로 할 수 밖에 없었다. 2010년에도 성모상이 뒤로 넘어져 새롭게 설치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2005년 프랑스 순례단의 방문을 계기로 세분 성인과 관련된 교구와 삼성산 본당이 자매결연을 맺은 바 있다.

2009년 2월 이철학 주임신부의 부임이후 성지에 대한 관심을 드높이고 성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사목회 내 성지분과를 성지 위원회로 격상시키고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자문위원회를 발족하여 위촉하였다.

2010년 10월 프랑스 순례단 20여명의 방문을 계기로 성지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성인들이 새 초상화를 유명 화백으로부터 그려서 삼성산 성당 1층 계단에 안치하였다. 관악구청 유종필 구청장과 구청 공원녹지과의 지원을 받아 제대 위 정자 설치와 다리공사 그리고 나무의 간벌을 통하여 녹지를 보강하고 있다. 그 외에 시설을 확충하고 성지 내 운동기구를 옮기고 성지순례의 분위기를 향상기켰다. 삼성산 교우들의 협조로 황금측백나무 220여그루의 식재로 묵주기도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삼성산 성당 본당설정 20주년을 맞이하여 십자가의 길을 교우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재배치하였으며 성지 표석을 설치하고 성지의 분위기를 드높이는 성역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2013년 10월 12일금요일 서울대교구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님을 모시고 표석 제막식 및 감사미사를 봉헌하기에 이르렀다.

 


삼성산 성지의 애로점

삼성산 성지는 관악산의 한줄기로써 지리적 여건이 국토이용계획 또는 도시이용계획상 개발에 많은 제한을 받도록 되어 있다. 현재 지목이 공원녹지로서 성지나 문화유적지로의 개발은 조금씩 진행하고 있으나 많은 제약이 있다. 구청의 도움도 음성적으로 제한적으로 받고 있다. 지역 민원인의 전화 한통으로 녹지과에서 달려와 제제를 하는 등 어려움이 많다. 교회내 성지에서 문화 유적지로 승화시켜 세 성인의 현양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교회단위의 독자적인 추진보다는 관공서와 공동으로 추진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첫걸음으로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역사 문화유적지로 지정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에 대한 절차나 행정적인 도움을 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나 기타 기구의 협력을 청한다.

표석은 세 개를 마련하였다.
첫 표석은 삼성산 교우들이 성지를 20여년을 관리하며 지켜온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았다.

 
 
제1표석 : 삼성산 성지 - 송덕비
성지는 교우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발전한다.
본당 설립 20주년를 맞이하여 지난 20여년간 삼성산 성지를 가꾸고 보존하는데 기여한 삼성산 성당 성지위원회와 모든 교우들을 칭찬하며 감사의 마을 담아 이 비를 건립합니다. 삼성산 성지의 개발과 보존 그리고 성지 운영에 더욱 더 관심을 갖고 협력해주시길 당부합니다.

2012년 10월 14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삼성산 성지
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

두 번째 표석은 이정표 역할을 하는 기능으로 성지 순례객들이 포토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성지 표석 2
- 성지는 교우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발전한다.

2012년 10월 14일 상성산 성당 설립 20주년 기념
염수정 안드레아 대주교 축성
 
 
   
  본래 ‘삼성산’이란 명칭은 고려 말의 명나옹·무악·자공 등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곳 한자락에 천주교 성직자였던 세 명의 성인 선교사의 유해가 안장되었고, 그 결과 1970년대 이후 천주교 안에서는 ‘삼성산’을 가리켜 ‘세명의 성인 유해가 안장되었던 성지’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삼성산 성지 연혁



삼성산 성지(서울시 관악구 삼성동(구 신림동) 57의 1)는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주교, 성 모방(P. Maubant, 羅伯多祿) 신부와 성 샤스탕(J. Chastan, 鄭牙各伯)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온 교회 사적지이다.

본래 ‘삼성산’이란 명칭은 고려 말의 명승 나옹·무악·지공 등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곳 한 자락에 천주교 성직자였던 세 명의 성인 선교사의 유해가 안장되었고, 그 결과 1970년대 이후 천주교 안에서는 ‘삼성산’을 가리켜 ‘세 명의 성인 유해가 안장되었던 성지’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는 1857년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882년 5월부터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을 위한 교회 재판이 시작되었으며, 1885년에 시복 판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는 1886~1887년에 삼성산으로 가서 순교자들의 묘역을 확인하였다.

그 후 시복 추진 작업이 결실을 맺을 단계에 이르자, 서울교구에서는 1924년에 명동 대성당 지하 묘역에 안치되어 있던 세 가경자의 유해를 꺼내 일부만을 남겨둔 채 대부분 로마나 파리 등지로 분배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분배처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세 가경자는 이듬해인 1925년 7월 5일에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70년 봄, 대방동 본당 주임으로 있던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안드레아)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루가) 신부의 회고를 토대로 삼성산 무덤 자 리를 찾게 되었다. 그 해 5월 12일에는 옛 무덤 자리에 '삼성산 순교 성지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노기남(바오로) 대주교, 그리고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가졌다. 이어 1981년 9월 6일에는 신림동 본당 신자들이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 아래 삼성산에서 세 복자 묘비 제막식을 갖고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삼성산을 순례 성지로 성역화 하려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2년 9월 29일 신림동 본당에서는 유영도(디오니시오) 신부의 지도 아래 ‘삼성산 성역화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시성식이 있던 1984년에는 교구와 신림동 본당에서 삼성산 성지 일대의 부지 15,800여 평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1989년 9월 10일에는 성인 무덤을 새로 조성 단장하고, 제대 및 울타리를 설치 완료한 뒤 교황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와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배세영 신부, 오기선 신부, 유영도 신부의 공동 집전 이래 무덤 축복식을 가졌다. 특히, 이날 명동 대성당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다시 삼성산으로 가져와 무덤 안에 안치하였다. 1992년 9월 24일 삼성산 본당이 설립되면서 삼성산 성지의 관리는 이 본당에서 맡게 되었다.

삼성산 본당은 1993년부터 본당내에 현양위원회를 두고 본당 차원의 현양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즉, 성지 순례객과 삼성산을 등반하는 교우들을 위하여 매주일 11시에 성지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매월 21일에는 세 성인의 치명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교자 현양 미사가 정례적으로 봉헌하고 있다.

삼성산 성지는 자연속에서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레지오 단체의 야외 행사나 서울시내 본당의 각종 단체 행사 등 순례객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삼성산 성지의 행정 구역상 위치와 개요

위치 서울특별시 관악구 삼성동 산57-13번지
개요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소유이던 임야를 산 57-14로 필지 분할하여 1989년 2월 9일 재단법인 천주교서울대교구유지재단 명의로 매입하였다.
성지의 총면적은 52,503㎡(15,882평)이지만 그 중 성지입구를 중심으로 한 5,600평은 피정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산성령수녀원에서 사용하고 있으므로 실제 성지의 면적은 10,282평이다.
 

삼성산 성지의 개발방향

문화유적지 지정

삼성산 성지는 외국인 선교사인 세 순교 성인의 묘소를 가진 세계적인 성지이면서도 우리 교회의 신자들만을 위한 성지 시설로 인식되고 있을 뿐 지역사회의 모든 주민을 위한 일종의 문화유적지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교회와 관공서와의 공동추진을 통하여 우리지역 및 더 나아가서 국가적인 차원의 문화 유적지로 승화시켜 세 성인의 현양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성지에 대한 홍보

성지 개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성지에 대한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홍보이다. 신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삼성산 성지를 알리고 성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순교자 현양운동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지에 대한 홍보가 선행되어야 한다. 삼성산 성지는 서울 시내에 있으면서도 등산길 길목에 있기 때문에 성지 순례와 등산을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삼성산 성지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세 성인에 대한 현양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예컨대 삼성산 성지의 자연 친화적인 특성을 십분 살려 쉬는 동시에 건강을 증진하면서 순교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순교 영성을 체득할 수 있는 ‘가족단위 주말피정’ 프로그램이나 ‘관악산 등반과 함께 하는 미사 참례 또는 삼성산 성지 순례’ 등 사계절별로 삼성산 성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색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순교자 현양 대회 개최

세 성인의 순교 영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현양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순교 현양 대회를 개최할 필요가 있다. 매년 정례적으로 세 성인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여 현양 대회를 개최하여 공식적인 공경 행사를 가짐으로써 순교 성인의 고귀한 죽음을 기억하고 순교 영성을 이어 받도록 하여야 한다.

국제적인 순교자 현양 운동

세 순교 성인에 대한 현양 운동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 성인의 고향인 프랑스에서도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앵베르 주교의 고향에는 1992년에 성 앵베르 기념성당이 건립되었으며 성 샤스탕 신부가 세례를 받은 성당에는 스테인드글라스에 한복 차림을 한 샤스탕 신부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세 성인의 출생지나 성장지는 중요한 사적지임에 틀림없는 곳이다. 따라서 세 분 성인이 태어나서 성장한 고향에서의 현양 운동과 순교한 한국에서의 현양 운동을 접목할 수 있도록 세 성인의 고향 본당과 삼성산 본당이 자매결연을 맺어 우리 교우들에게는 세 성인의 성장 배경이나 외국의 신앙문화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세 분 성인의 고향 본당 교우들에게는 세 분 성인이 순교하신 현장이나 순교 이후의 한국내에서의 현양 운동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외 성지 순례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상호 교류도 추진해 볼 가치가 있다.